문학상수상집을 읽고 있다.
문학상 수상집을 읽고 있다.
우리나라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교보 sam으로 볼 수 있는 소설이 2017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었다. 문학상 수상집을 오랫만에 읽는다. 책 속에는 전에 작품을 봤던 작가도 있고, 처음 보는 작가도 있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입안에 맴도는 맛은 일종의 패배감이다. 피해자, 약자, 혹은 이런 약자들을 보는 지식인의 안타까움과 무기력 등등. 예전부터 알던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랫동안 못 만났던 먼 친척 형을 만난 것 같은 거리감과 낯섦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확실히 영화의 태도와는 달랐다. 그래서 이렇게 낯선지도 모르겠다. 영화와 소설의 관점과 태도가 다른 데는 여러 가지 이유와 조건이 있다. 하지만 과격하게 이걸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최근 4편까지 나온 영화 <범죄도시> 속 대부분의 인물들을 한국 소설에서는 (특히 단편에서는) 그 비슷한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도 많다. 그러니 내 생각이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이건 일종의 부끄러움이다. 겸손함이다. 내 생각의 밑바닥에도 이런 소설의 분위기가 남겨 놓은 흔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늘 부끄러워한다. 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에 고통 받고 희생되고 희생하는 사람이 저기 있는데 하고.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싫었다. 내 몸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글에는 또 어김없이 그런 정서가 깃들어 있다. 싫으면서도 닮은 구석이 있다. 그래서 늘 부끄럽고, 또 그게 늘 짜증 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소설가들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 나는 이 작가들만큼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만큼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또 부끄러워진다.
쓰고 보니 난데없이 핑계 거리 하나 잡아서 난장을 치는 시정잡배가 된 기분이다.
옳거니,
내가 잡배지 그럼 뭐겠는가.
“정확한 실패는 가장 절실한 문학의 윤리다. 치열한 무력감을 통해 문학의 실체와 미래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학적 증언을 듣고 난 후 상처받을 권리와 위로해줄 의무는 이제 독자들에게 있다.” (심사위원 심사평)
무력감으로 문학의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건 나로선 참 해괴한 궤변이다. 어쩌라는 건지.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이걸 읽고 독자가 상처 받는 건 권리란다. 왜? 상처 받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는 말인가? 무력한 작가를 위로할 일이 독자의 의무란다. 이게 말이 되나? 대체 의무는 어떻게 다해야 하나? 책을 사? 작가한테 위문편지라도 보내나? 소설가 대신 독자가 소설을 써야 한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무력감으로 더 글을 쓰지 못할 테고, 그래서 대신 독자가 소설을 쓰는 “문학의 미래”에 도달한다는 신박한 생각일까? 나는 이 심사평이 AI가 쓴 건 줄 알았다. 2017년엔 쳇gpt도 없었을 땐데, 이렇게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되나? 이게 뭐냐. 한심하다. 정말.
